임진왜란 위기 극복은 누구의 공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는 대부분 이순신, 권율, 그리고 왕세자 광해, 의병들 등을 말한다. 그런데, 선조는 자신이 바로 그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 실록이 왕의 기록이기 때문에 선조의 그런 생각이 기록에 남아 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신하라면 임금에게 그 공을 돌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선조는 일단 무명에 가까운 이순신을 초고속 승진을 시켰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발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선택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아무리 능력자라 하더라도 임진왜란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자고로 조직은 무조건 인재를 잘 발탁하는 리더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선조가 단순히 이순신만 등용한 것은 아니다. 유성룡 같은 재상도 발탁했다. 물론 모든 인재 등용이 성공할 수는 없지만, 견제 속에서 임진왜란 중에도 단 한 번의 역모 없이 중앙권력이 유지된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을 중간에 처벌한 것은 큰 실수이긴 하다. 하지만, 이 또한 뒷 수습은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간 것 또한 잘 했다고 생각한다. 중앙 권력이 유지되어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한양을 지키겠다는 것은 이상주의적인 발상일 뿐, 가능하지 않았다. 왕이 잡히면 모든 것이 끝난다. 겨울이 오고, 왜군은 피곤해진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리더의 덕목이다.
이순신은 너무나도 영웅적이었고, 광해 또한 너무 영웅적이었다. 그 난세에 다음의 권력이 어디를 향하는 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광해야 왕세자였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순신은 왕의 입장에선 분명히 위험한 인물이 맞다. 견제를 해야 하고, 힘을 꺾어야 하는 것이 맞다. 비록 이순신이 역모의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역모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권력이 양분되면 평화가 깨진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어야 평화로워진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나는 이러한 질서를 어느 정도는 지지한다. 그렇듯 국가에서도 절대 권력이 굳건할수록 국가가 평화롭다. 요즘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권력이 팽팽해지면 서로 갈등이 고조되면서 국력이 양분된다. 과거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시절에 이르던 권력의 일관성. 김대중-노무현에 이르던 권력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물론 철학적으로 빈곤하거나 원칙이 빈곤하거나 부패하다면 권력의 일관성은 부패해지기 마련이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순신같은 훌륭한 임원이 있다면 선택은 2가지다. 이순신을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거나, 이순신이 오너 권력을 넘보기 전에 힘을 빼야 한다. 그리고 이순신 같은 사람의 힘을 빼면, 그 기업이 존폐의 위기까지 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순신같은 임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창업을 했을 것이고, 오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치밀하고, 직원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창업을 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는 것은 선조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이순신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는 지 궁금해졌다.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했고, 그것을 실천했던 사람. 목표는 이상주의자였고, 행동은 현실주의자였던 사람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일상의 소소한 행복, 아름다움이 있다. 이순신에게도 그런 것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탱하게 해 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하다 보니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고, 하다 보니 그런 짐을 짊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짐이 주어지고, 나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면 결국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 모든 짐을 감당한 뒤에는 죽음이 기다릴 지라도, 결국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살기 위해서도, 수없이 많은 또 다른 나를 위해서도, 그 짐을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순신은 그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 두려움으로 삶을 지킬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왔을 것이다.
오너쉽도 비슷하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나 하나 어찌되었건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창업이었다. 그런데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늘어났고, 점점 되돌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끝에는 폐업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사회적 기여를 하게 된다. 내가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폐업의 두려움이 경영적 선택의 과감함과 섬세함의 원천이 된다.
창업가는 선조이기도 하고 이순신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을 찾아서 발탁하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하고, 공을 부하들에게 돌려줘야 하고, 그 험난한 전쟁을 이기고도 온갖 욕은 다 먹는 선조이다. 또한 매번 전쟁에 임하면서 두려움에 휩쌓이고, 공격에는 선두에 서야 하며,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며, 불확실성을 확실로 바꾸기 위해, 잠을 줄여 가며 연구하고 조사해야 하며, 협업을 위해 무례한 자들에게 굽신하고, 때로는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이순신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승리가 아닐 수 있고, 영광이 아닐 수 있는, 승리가 있기 전의 이순신이고 선조이다.
그러니 창업가는 폐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 가고, 소소한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간혹 에너지를 얻긴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도, 그것만 추구하며 살 수도 없다. 창업의 시작부터 끝을 보기까지 폐업의 두려움이 삶의 전부가 된, 승리하기 전의 이순신이고 선조이다.
'기업가정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리스타 챔피언의 길, 콩쿨 우승자의 길, 사업가의 길 (0) | 2024.05.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