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슬럼프는 우울증을 겪기 시작하는 의사의 이야기이다. 의사보다도 더 많은 비율로 우울증세로 고생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회사의 CEO이다. 좋은 CEO들은 회사의 모든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것이 정석이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세계 경제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얼마 안 되는 정보로 사람을 판단하고 채용해야 하고, 몇 마디 없는 대화와 데이터로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니 결국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된다. 그 와중에 결정은 혼자만의 몫이 된다. 여러 의견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의견은 책임을 지는 의견이 아니므로 결국 자신이 결론을 내리게 된다. A가 의견을 내고 그것을 채택했다 하더라도, 채택한 것은 자신이므로 자신의 결론이고, 그 책임은 자신의 것이 된다. 잘 된다고 그것이 자신의 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잘 되면 그 공은 A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이렇듯, CEO는 우울증을 달고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고, 미래는 희망이 없다. 다만 자기 제어를 잘 하기 때문에 낙관하고, 성공의 확률을 높이며 희망과 투쟁의 에너지를 품고 산다.
이런 사람을 바라보는 가족과 지인은 어떨까? 가족은 그런 사람의 에너지에 짓눌릴 수도 있지만, 그가 집에서 내색을 하지 않는다면, 짓눌리기보다는 경제적 자유 속에서 평화롭게 살게 된다. 반면 그는 밖에서의 삶을 집에서는 내색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어떤 충전도 쉽지 않게 된다. 가족들은 사업이 평화롭기만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공한 사업 중에 그런 사업은 없다. 그것은 그들의 환타지일 뿐이다. 그의 희생 속에 그들의 환타지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우울증이 왔고, 무기력한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우울증 진단까지 받으며, 모든 것에서 내려오게 되면 가족들은 어떻게 그를 대할까?
닥터 슬럼프에서는 의사를 자랑으로 삼던 부모의 태도가 보인다. 부모는 자식을 자랑으로 삼는다.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으며, 자식의 고민을 대신해 주지 못 한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의 현재의 감정을 지지해주지 못 한다. 거대한 자랑거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 거대한 상실감을 느끼고, 그것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가족으로부터 겪게 되는 첫번째 거대한 상처다.
지인들은 잘나가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상당수는 시기와 질투로 바라본다.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는 20%도 안 된다. 대부분은 숨겨진 시기와 질투다. 나머지는 관심이 없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여기서도 상처는 이어진다. 따뜻한 시선으로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정심을 통해 자신의 삶의 가치를 느껴 보려 한다.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 동정심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이 지인으로부터 겪게 되는 매우 낯선 상처다. 잘나가는 사람에게 동정심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참 어색하다. 자존심이 상하고, 우울증이 더 심한 우울증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우울증이 생기면 모든 것에 의지가 없어지고, 감정도 사라진 상태다. 또 과대망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정상적인 판단이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을 점점 안 만나게 된다. 점점 자신을 혼자만의 공간으로 가두게 된다. 이런 결정과 행동들이 지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때로는 욕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울증을 인정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다. 사회 관계를 단절하면, 나중에는 사회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들도 이러한 선택을 추천하지 않는다. 의사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라고 하지만, 아주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만날 엄두를 못 내게 된다.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떠한 사람들도 우울증을 이해하지 못 한다. 내 경험으로는 정신과 의사도 이해하지 못 했다. 우울증을 겪었던 사람들도 우울증을 이해하지 못 한다. 이유가 다양하고, 그것을 돌파하는 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이해를 바라는 것은 큰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인정도 쉽지 않다. 뇌가 고장난 상태를 과연 누가 인정해 줄까?
우울증을 겪으면서 내가 비교적 가벼운 인간 관계를 모두 정리하면서 다짐했던 것은, 나의 현재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타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새로운 도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공간을 굳건한 요새처럼 만드는 것이다.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아침, 점심, 저녁을 훌륭히 차려 먹고, 평소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다면, 회사와 잘 협의해서 해 보는 것도 좋다. 아름다운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최대한 많이 듣고, 마음을 많이 열고, 많이 느끼고,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감성과 이지적인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도를 해야 한다. 많이 자고, 많이 운동하는 것도 좋다.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멍 때리는 시간도 가지는 것도 좋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지친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다. 가급적이면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
우울증을 빠르게 극복하기 보다는, 우울증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잠잠히 살아가는 것이 좋다. 자꾸 극복하려면 안 되는 것에 좌절감만 커져간다.
과연 닥터 슬럼프의 주인공들은 그런 삶을 살게 될까? 3화까지 가 보니, 왠지 연애 드라마 같다. 연애를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연애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사랑의 종말은 대부분 비극이고, 사랑은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우울증 해결의 실마리가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울증 탈출의 계기는 될 수 있을 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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